단양의 시련 수해

시련 (72년 88년 90년 94년 수해)

1972년 수해

1972년 8월 19일 오후 1시 150년 만의 대홍수로 기록되고 있는 이때의 장마는 단양 사람이면 아마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이재민만 해도 10,366명에 달했고 95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냈으며 거의 모든 도로와 하천이 유실된 당시의 참상은 기억하기조차 두려운 물난리였다. 단양군청 소재지가 있던 단양읍(현재 단성면) 시가지는 물속에 파묻혀 아예 흔적도 없었고 매포읍 시내 역시 물 위로 집채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6.25 사변 전쟁 중에도 소실되지 않았던 군청의 보존 자료가 대피할 겨를도 없이 떠내려갔으니 그 피해의 심각함이 오죽했으랴. 그보다 한 가지 잊지 못할 사연이 있다.

증도리라 불리던 시루섬 재난은 어둠을 따라다닌다고 했던가. 강물은 불어오기 시작하고 어둠이 덮쳤다. 이곳 주민과 마침 이곳에 와 있던 잠업 연수생 30명을 포함한 237명. 사면이 강물로 둘러싸여진 고도와 같은 곳에서 이들이 피할 곳이란 어디에도 없었으니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천우신조였을까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힐긋이 보이는 물탱크 그리고 그 옆으로 의연하게 서 있는 소나무.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탱크 위로 올라갔다. 높이 6m 지름 5m의 시멘트로 된 물탱크 위에서 밤을 새운 273명의 주민들은 이튿날 아침 가까스로 구조되긴 했으나 이런 와중에서 6개월 된 젖먹이 어린아이가 압사 당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다고 할 것인가.

1972년 수해당시 단양의 모습

1980년 수해

1972년도 수해 후에도 단양지역의 물난리는 계속되었다.
특히 1978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과 1984년부터 1994년까지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중에서도 1989년도 수해는 1972년 이후로 최악의 시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해의 조짐은 1988년 7월 9일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예년과 같은 장마려니 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7월 20일 새벽 4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는 차라리 빗줄기가 아니라 동이로 쏟아 붓는 격이었다.

시우량 300㎜를 기록하면서 퍼붓는 빗줄기는 4시간 동안 자그마치 연평균 강우량의 48%에 해당하는 1,114㎜의 가공할 수량이었으니, 그중에서도 매포읍을 중심으로 한 적성면 북부 일대와 어상천면 일대, 영춘면 지역은 아예 거대한 물바다를 이루어 교통은 물론이고 모든 연락망이 끊겨 고립무원에 빠지기도 했었다. 더구나 당시의 하천은 하폭이 좁고 하상이 높은 자연 유수 지역이어서 농경지의 피해가 극심했다. 당시 수해로 실종되거나 사망된 희생자 수가 8명에 달하고 집을 잃은 이재민 숫자가 자그마치 6,530명에 달할 정도였으니 그 참상은 이루 다 형용할 길 없는 것이었다. 건물 피해 1,550동, 농경지 유실 657㏊, 연장 22㎞의 도로 가 완전히 유실되었고, 6개 교량이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으니, 수해가 지나간 자리는 목불인견 그대로였다. 어린 자식을 잃은 부녀자의 통곡, 둥둥 떠내려가는 송아지를 보면서 발을 구르는 농부, 신혼의 단꿈을 물살에 떠내려 보내야 했던 젊은 신랑·신부 어디 그뿐이랴! 목이 쉬어라 울어 젖히는 젖먹이 어린 것을 혼자 두고 이불 보따리 하나라도 더 건져야 된다며 물속으로 뛰어드는 이웃집 아낙을 보면서 모든 이들은 한마음으로 통곡했으니. 어찌 통곡만이 한마음이겠는가. 그들은 다시 굳건히 일어섰다. 밟으면 밟을수록 강건해지는 잡초처럼 수재민들은 빗줄기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삽자루를 다시 잡았다.
정부의 보조가 있었지만 그것이 보금자리 자체는 아니었다. 허물어진 벽체를 쌓아 올리고 무너진 기둥을 일으켜 세워 물마가 있기 전보다 더 아늑하고 깨끗한 집과 마을로 단장했다. 이것을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아니 위대한 인간 정신의 승리일 것이다.

1980년 수해당시 단양의 모습

1990년 수해

1990년 여름, 유래 없이 잔인한 여름이었다.
한 해 여름에 세 번씩이나 물난리를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1990년 7월 14일 ~ 7월 19일까지 총 강우량 160㎜, 매포 상수도 집하장의 둑이 무너지면서 그 밑에 있던 일가족 5명이 매몰하는 참사가 있었다. 같은 해 8월 20일부터 다음날 21일까지 99.5㎜의 폭우 그리고 여름 장마가 끝나는가! 했는데 9월의 늦장마가 덮쳤다. 9월 9일부터 9월 11일까지 총 강우량 201㎜의 집중호우는 물론 천문학적인 강우량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호우는 예년에도 있었고 과거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강우량이었다.

강물이 많이 불었고 유수량도 엄청나게 늘었다. 그러나 당시 수해는 다분히 인위적인 면이 많았다는 점, 다시 말해서 원인이 집중호우에 있었다 하나 그 근원은 충주댐 측의 저수량 조절이 신축적이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남한강의 수계는 오대천과 송천이 합류하여 정선에 이르고 영월로 흘러들 즈음엔 주천강과 평창강이 가세하게 된다. 호호탕탕 솟구치는 강줄기는 단양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돌리게 되는데 바로 충주댐 저수막의 최북단이기 때문이다. 단양에서부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제천천을 더하여 댐은 갑문에 이르게 되고, 여주와 팔당을 거쳐야 비로소 서울을 지나 황해도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물줄기의 흐름도를 보아 정선이나 평창, 영월에서 불어난 물이 단양으로 유입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그물이 다시 충주댐을 거쳐 팔당을 지나 서울로 가게 되리라는 것도 뻔한 것이다. 4대강 유역 개발이 국토의 균형적인 개발을 도모하자는 것이고 보면 그 일환으로 추진된 충주댐 건설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1990년도의 물난리는 오히려 충주댐에서 기인했다는 분석이었으니, 다시 말해서 충주댐 하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충주댐 방류를 자제했고 결과적으로 정선 등의 상류에서 불어나기 시작한 물이 더는 흘러내려 갈 곳이 없자 단양에서 쌓이게 되어 물이 거꾸로 역류하게 된 것이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 매포 시가지 일원이었다. 이로 인하여 당시 지사(주병덕)가 경질되는 불상사가 있기도 했지만, 주민들의 불만과 원성은 단순히 그러한 피해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홍수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수해 역시 어느 때라고 장담할 수 없는 마당에 충주댐 하류를 지키자고 언제까지고 상류 지역의 주민들이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느냐는 노파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기화로 하여 매포읍 매포리 일원에 있던 시가지가 평동지역으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으니 단양은 이래저래 물 때문에 울고, 물 때문에 피해 다녀야 하는 고장인 셈이다. 신 단양 이주가 그렇고, 적성면 하진리 집단 이주가 그렇고, 매포읍 시가지 이주가 그러했으며, 1995년도에 이주한 문화마을이 그런 것이다. 번듯한 주택이 보이면 그것은 영락없는 수해 주택이고 새로 포장된 길과 하천제방이 새롭다고 여겨지면 물어볼 것 없이 수해복구 사업의 결과인 것이다.
그 후 1991년, 1992년, 1993년을 거쳐 1994년도 6월 30일부터 7월 1일까지 양 이틀간에 걸쳐 장대살 같이 퍼부어댄 빗줄기는 단성면과 대강면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홍수로 단성면 북하리에 가구를 옮기던 3명 중 1명이 실종되는 참변을 당했다. 68세대 222명의 이재민을 낸 당시 호우로 선암계곡과 사인암 계곡이 전몰되었고 상, 중, 하선암 등 단양팔경 대부분이 복구 불능의 상태로까지 피해를 입었다.

1990년 수해당시 단양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