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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면

영춘면 온달산성과 주변마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3,815
온달산성은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3국의 영토분쟁이 가장 치열하고 심하던 때에 쌓아졌다. 신라가 죽령길을 서기158년 죽죽이 개설하고 죽령을 중심으로 하여 한강을 장악하고자 손길을 뻣친 곳이 신라의 적성산성이고 서기 551년경 적성산성이 신라군에 접령되어 전승기념비로 세운것이 적성비다.

이때에 고구려 사람은 영춘 온달산성에서 수자리를 살고 신라사람들은 적성산성에서 수자를 살았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온달산성은 외국의 학자들이 찾아와 답사하고는 감탄을 자아내는 곳이다. 1400여년전에 쌓은 산성이 현재까지 무너지지 아니하고 잘 보존된 것을 볼 때 얼마나 정성을 드렸으며 축성기법이 놀라운지 짐작이 간다. 온달산성이 쌓여진 연유는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때 신기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돌을 가져다가 산으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을까 또 무수한 전설과 이야기가 있고 지명의 전래 사연이 있고 속담이 온달장군과 연관되는 것이 많이 있다. 온달산성을 평강공주와 아루아침에 쌓았다고 한다. 또 그렇게 쌓을수는 없을 것이고 사태가 급박하여 빠른 시일에 쌓았다 하겠다. 이 산성이 주는 교훈은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지 아니하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 하였다면 우리나라의 국경은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였음을 생각할때 거대국 만주의 대륙적인 기질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온달장군은 약속을 지키는 용장으로서 언행일치를 행한 투철 사명감과 군인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온달을 바보라고 하는데 온달은 바보가 아니였고 홀어머님을 봉양하고자 좋은 음식을 대가집에 가서 얻어다가 봉양하는 극진한 효심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평강공주는 신분을 초월하고 부귀영화를 버리고 한 남성을 국가의 기둥으로 키운 내조의 힘을 표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온달산성 주변의 6㎞ 이내의 122개 마을이 모두 지명과 유래 되었다. 특히 4㎞ 이내의 82개마을중 60%가 군사적 전술용어로 되어있어 온달산성의 이름 자체를 되살려 준다. 그중 자연마을 명칭 몇개를 소개하면 꼭두방터는 기마병을 막기위해 진을 치던 곳으로 은포동은 고구려군의 돌포가 있던 곳이고

면위실은 온달장군이 신라군에 포위되어 죽음을 면한 곳이고 군간은 군사가 나가 보초를 스면서 온달산성으로 보고하던 지역이며 쇠점불이 쇄골은 전쟁장비를 재생하던 곳이며 또한 수리하던 장소이고 피바위골은 서로 싸우면 흘린 피가 산바위에 많이 묻어 피바위 골이며

전쟁와중에도 자연보호는 확실하게 한 화장실인 통쉬골,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일일이 흙으로 파서 묻을수 없어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돌무지골, 군사들이 서로 싸우다가 부상병이 피아를 구분하지않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함께 살았다는 안이골, 군사들이 한쪽 골짜기로 진격하면 집중공격을 받을까봐 나누어서 진격한 골자기를 분산골이라 한다. 이렇게 온달산성 주변에는 사연을 가진 지명이 많다. 또 온달성을 아단성이라고 했는데

조선 태조의 이름을 중국서 받아올 때에 단 자를 받아 왔으므로 당시 현의 이름을 감히 왕의 이름과 같이 함부로 부를수 없어 단 자에 획을 두번 그어서 차 자를 쓰게 되어 아차성이 되었고 또 현 명칭을 을하차현이라 불렀다. 이것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을은 꼭대기 시원지를 말하며 아은 한강을 아리수라고 했고 단은 아침 단자로 있다가 차 자로 변했다.

이것을 한글 그대로 말 한다면 한강상류 골짜기 동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오늘의 영춘과 같으므로 서울 광장리에 있는 아차산성과는 글자와 어원이 틀린다. 이 온달성을 중심으로 많은 산성이 있고 남천리 성골에 가면 산 능선으로 남은 산성이 그대로 있고 세목이 세거리에도 문루와 같은 산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 산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이야기는 온달이 평강공주와 군사들의 사기를 복돋아 주자고 편을 갈라서 윷을 치던곳의 윷판바위는 당시의 전략도라고는 하나 전쟁중에도 군사의 사기에는 무척이나 신경을 쓴 것이 사실이다. 온달이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것이 광주라고는 하나 사실은 광천이다. 여기에서 평강공주가 이제 죽고 사는것이 결판 났으니 서로가 갈 길을 가는것이 현명하다고 하며 평강공주의 덧저고리를 벗어서 관위에 놓고 통곡하여 관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고 이곳 촌노들은 슬피우는 사람을 보고 평강공주 온달이 관 떠나보내는것 같더라고 이야기 한다.

평강공주가 이곳 전쟁터를 찾아와 함께 있었다는 공주굴이 있고 요즘의 탈의실 장군막사로 쓰던 즉 옷을 갈아입고 자세를 가다듬던 곳을 자습이라 하여 마을 명칭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소재지 : 영춘면 하리 산62번지
- 년 대 : 삼국시대
- 제공자 : 영춘면 하리 우계홍(70)
- 제보자 : 영춘면 / 197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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