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 메뉴


가곡면

가곡면 겸암산 유운룡의 묘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4,372
서예 유성룡은 잘 알아도 유성룡의 형 겸암 유윤룡은 잘 모른다. 유겸암의 묘가 가곡면 향산리 늪실 개명산에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또 이묘할때의 대역사와 묘를 쓸때 권세가 였던 유시의 묘의 이야기도 많거니와 아는 이가 없다. 겸암선생은 풍산유씨의 종손이다.
그런데 이분이 왜 남천리 대어구에서 산수를 즐기다가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영춘(옛날 향산리라는 영춘군)땅에 묻혔는지 그 이유와 연유를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그분은 산세를 즐겼고 단양 산천의 오묘함과 특히 소백산의 경관에 도취하였다 한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 유겸암 유서애 선조들이 훌륭한 인물을 낳고져 3대를 적선을 하였다 한다. (거리에 여막을 짓고 배고픈 사람구제) 그것도 모자라 형은 심산유곡에 와서 공부만 하고 자연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때 정계에 나가 나라를 구하는 일을 했지만 겸암(謙菴) 유운룡(楡雲龍)은 동생(서예)이 일을 잘 보도록 현재로 말하면 이권개입이 전혀없이 집안일과 자연만 벗삼았다한다. 집안에서 모두가 서예가 크도록 도와준 셈이다.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숙맥이라 한다. 즉 숙맥은 콩(叔)과 보리(麥)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유성룡을 키우기 위해서 집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숙부는 하도 못나서 별명이 삼숙이로 어리석고 우둔하고 엉뚱한 일 잘하는 삼촌이 있었다. 삼숙은 늘 찌그러진 갓 떨어진 옷 양반에 안 어울리는 행동과 작태가 마을과 인근 군까지 소문이 난 사람이다.

유성룡이 집에 내려와서 관가주변 사람들은 만나고 집안 사람 만나고 여간 바쁘지 아니했다. 그런데 삼숙이 삼촌이 "국사에도 바쁘고 친교에도 바쁘고 하겠지만 집안일은 형인 겸암이 다 맡아서 하고 있으나 겸암이 모르는게 있어 내달 안으로 내려와서 언제 시간이 있으면 집 하인을 보내서 나에게 연락하면 언제나 나는 찾기 쉬우니 꼭 조용히 내가 요긴하게 할말 딱 한가지가 있으니 부탁한다고 하였다. 늘 집에 왔다가 다녀갈 때만 되면 어리석은 삼촌이 생각났다. 그러던중 내려와서 이번에도 모든일을 빨리 처리하고 꼭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모든 일을 끝내고 고향에서 제일가는 사람과 바둑을 두어서 유성룡이 모두 다 이겼다. 모두가 유성룡의 바둑솜씨에 놀랐다. 당대에 바둑에는 유성룡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한다.

기분이 좋아서 놀이도 끝나고 있다가 갑자기 삼촌이 생각나서 하인을 시켜 불러 오니 "허허 바둑을 둔 모양이군 " "예" "그럼 어디 나하고 한수 해 볼거나" 유성룡은 깜짝놀란다. 중앙에서도 잘두어 나를 따를 자가 없고 고향에서도 모두 나를 대할자가 없으니 유성룡은 의아해 하면서

두어 보았자 단시간에 자기가 이길 것으로 생각하고 바둑을 두는데 유성룡은 이것저것 생각하며 두는데 삼숙이 삼촌은 유성룡의 바둑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놓아 댄다. 바둑판이 거의다 차고 보니 막상막하인데 한수만에 만방으로 어리석은 삼촌에게 패하고 나서 유성룡은 감탄하기 시작한다.

나를 이렇게 키우기 위해 형은 인근 풍기군수를 지내면서 늘 부모님을 모셔 집안걱정을 안하게 하고 삼촌들이 나보다 훌륭한데도 초야에 묻혀서 나를 빛내주려고 함을 감탄하고 있을 때 아무도 없으니 내가 한마디 하겠는데 자네가 3일후 이곳을 떠나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요" 글세 아마 떠나기 전날 중 하나가 찾아와 자네집에 자기를 간청할 거야. 그때는 절대로 자네집에 재우지 말고 뒷산 암자 나에게로 보내게" 이것만은 꼭 지켜야 하네 중대한 일이야! 나의 부탁일세" 바둑도 졌겠다. 어리석은 삼촌의 첫 번째 부탁이고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하여 대답했다.

유성룡 형 겸암과 상의해 본 결과 나는 벌써 알았는데 너는 이제 알았느냐. 국사에만 전념하는 삼촌의 큰 꾸짖음으로 알고 처신하라고 형이 말했다. 가기 전날 밤 저녁에 스님이와 서 자고 가기를 원하자 저녁을 대접한 후 오늘 우리집 선조 기고가 드는 날이라 3일전부터 일체 본가에서는 안재우는 것이 우리집안의 풍습이니 양해해 달라며 하인을 시켜 삼촌암자로 보냈다.

암자에 도착한 중은 삼숙이 삼촌과 집에서 빗은 술잔으로 인사를 나누며 거나하게 취하여 스님을 잠자게 한 다음 손과 발을 묶고서는 사방의 장지문을 열어 찬바람이 들어오게 해놓고 술 깰 때를 기다리다 스님이 술이 깨어서 몸을 움직이려 하나 움직이질 아니하자 정신을 차려보니 결박당한 신세였다. "풍산유씨 대가댁에 대접이 겨우 이거요" 도대체 사람을 어쩌자는 거요 삼숙이 삼촌이 칼을 목에 대고서 "바른대로 말하면 죽이지는 않을거요 거짓말을 하면 죽여서 이곳 산속에다 묻을 것이다" "나도 양반인고로 너의 보따리를 풀어보지 아니했지만 우리나라의 길과 역마장 성을 낱낱이 표시한 지도와 문서렸다."하고 호령하니 "예 저는일본에서 조선을 치기위한 간첩입니다." "장군의 명령을 받아 조선 땅으로 왔습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요"하고 애원 하였다. "네 이놈! 너희가 조선땅에 상륙한 날도 알고 또 너희가 타고 갈 배와 날짜도 내가 안다" "너를 살려보낼터이니 다시는 풍산 땅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렸다."

일본의 간첩은 스님으로 변신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삼숙이 삼촌에게 혼이나 줄행랑을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임진왜란때 하회마을이 전란을 입지 않은 것은 삼숙이 삼촌의 힘이라 한다. 그러나 삼숙이 삼촌은 경암에게만 이야기하고 유성룡에게는 중 이야기는 하지 아니했다하나 나중에는 다 알았을 것이다. 당시 조카에게 자만심을 생각하여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운룡은 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겸암은 높은 벼슬을 하지 아니하였지만 소탈한 성품과 고매한 인품으로 3세 연하인 동생에게도 커다란 영항을 끼쳤다. 벼슬보다는 부모님을 극진히 모심으로서 성룡이에게는 절대로 집 걱정을 아니하고 정사에 전념하도록 하여 마을에 귀감이 되었다한다.

영춘면 남천리의 경암선생이 공부하던 터가 지금도 있다. 비마루의 비마사에 흩어진 돌을 모두다 유겸암선생 묘 축조때 가져갔다고 한다. 유겸암의 묘는 개명산 정상에 있었으나 이장해 가고 상석만이 남아있고 묘를 판 자리에는 인근의 석물과 돌로 채워져 있다. 묘 근처에는 다듬은 돌이 몇점 보인다.

편집자주 : 유운룡 (楡雲龍) 1539(중종 34)∼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응견(應見), 호는 겸암(謙菴). 아버지는 중영(仲?) 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진사 광수의 딸이다. 성룡(成龍)의 형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1572년(선조2)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典?司別坐)가 된 뒤 이듬해 의금부도사로 추대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다시 사포서별제가 된 뒤 금부예천(禁府例遷)풍저창 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주부로 승진하여, 진보현감등을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병 때문에 사퇴하였다가 다시 인동현감으로 추대되었다. 길재(吉再)의 묘역을 정화하고 사우(祠宇)와 서원을 지어 유학의 진흥책을 도모하여 그를 칭송하는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광흥창주부 한성부판관 평시서령 사복시첨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성룡이 선조에게 그를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읍소하니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도록 하여 모두가 그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그해 가을에 풍기가 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전란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조공을 평시와 같이 함으로써 얼마 뒤 다시 정군수(正郡守)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데 힘썼다. 그 뒤 원주목사로 승진 되었으나 어버이의 노쇠함을 핑계하여 사퇴하였다. 군국기무(軍國耭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은 이황의 이기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다. 저서로는 <겸암집>이 있다..

- 소재지 : 가곡면 향산리 늪실 겸암산(개명산)
- 제공자 : 영춘면 남천리 정인수
- 가곡면 향산리 천동태
- 체보자 : 영춘면 윤수경(80. 3. 4)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