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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면

단성면 단양인 초대 조계종 종정 하동산 대선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4,500

하동규 대선사는 단양군 단성면 상방리에서 1890년 2월 25일 출생하시었고 속명은 봉규, 동규라고도 하며 휘는 헤일이며 법령은 동산이시다. 부친은 성창 모친은 정씨였다. 부친은 자식교육에 관심이 지대하시어 1895년 (5세) 되던해에 서당에 입학시켰고 1903년 (13세)에 단양익명 보통학교에 전학하였으며 1906년 (16세)에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 19세에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자 이듬해 치욕적인 한일합방이 이루어졌다.
1912년 서을 총독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인 1913년 1월 부산 범어사 백용성스님을 은사로 오성월스님을 계사로 하여 득도하고 수게한다. 또 스님은 백양사에서 용성스님에게 전등, 염송, 범망, 사분률 등을 배우시고 이듬해 평남 팽산으로 가 우두암에서 한암스님에게 사교과를 수했다. 33세에 백양사 오문암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범어사에서 영명강백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1930년 (40세)에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3년 결사를 마치시고 범어사 금강계단의 전계화상이 되셨다.

그후 안변석왕사 내원서원에서 납자를 제집했으며 44세에 개오 45세에 범어사 조실이 되었다. 46세에 칠불계맥을 잇는 계맥을 전수 받았다. 1942년 일본 불교계를 시찰하고 1947년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설치 했으며 53세에 금강산 마하연의 조실로 있다가 55세에 다시 범어사 조실로 돌아온다. 1954년 (64세)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나서서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지냈으며, 1958년 다시 종정에 취임하여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대회 한국대표로 참석한후 1962년 종단분규로 잡음이 일어나자 종정직을 사임하고 1965년 3월 범어사에서 4월 입적 하시었다.

동 산스님의 특징은 한 사람의 수도승이라도 오면 올수록 기쁘게 생각하고 한 사람이라도 떠남을 섭섭히 생각하시고 만류했다고 청담스님이 증언 했다고 전한다. 스님은 예불시간이 되면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와도 30분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등 엄격한 수행활동을 했다고 하며 크거나 적은 암자이거나 설법요청이 있으면 절대로 거절한 적이 없다고 하며 당시의 권력자 이승만 대통령께 승려로서 호통친 사람은 동산밖에 없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1952 년 여름전쟁중 정부에서는 6월 6일 현충일 행사를 시극이나 국민의 정서를 보아서 부산 범어사에서 전몰 장병들을 위한 합동 위령제를 갖기로 하였다. 당시 범어사에서는 전몰장병의 유골이 원옹요와 안심요에 안치되어 있었다. 조실 동산스님은 매일 새벽 아치소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해서 고인의 극랑왕생을 기원했다. 위령제에는 전쟁중이지만 외교상 외국인과 외교사절을 대동한 국제적인 행사였다. 중절모를 쓴 이대통령이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외국인들에게 불단의 부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을 때 법주인 동산스님이 들어오면서 이런 모습을 보고서 대통령을 향하여 큰소리쳤다.

" 한나라의 대통령이 어디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하고 있소?" 하며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호령 하려하자 이대통령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중절모를 벗고는 "이분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하려다 그만 실수를 했소이다." 하고 정중히 사과했다. 법회가 끝난후 이대통령은 동산 대선사에게 어찌나 미안했던지 재차 정중히 사과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동산 스님은 바른 것은 바른 것으로 알려주기를 서슴지 않은 것은 오랜 수행으로 다져진 강직성 때문이라고 보좌하는 스님이 전하고 있다. 또한 이야기는 동산 스님이 태국 불교의 나라 종정과 총무원장을 비롯한 고승이 내한한 일이 있어 그때의 몇가지 일화를 들어보면

① 충무원에서는 공양을 육식으로 하느냐 완전 채식으로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다가 육식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공양후 차 마시는 시간에 한국의 스님이 태국 총무원장에게 물었다. "우리 대승불교 교단에서는 스님들이 육식을 금하고 있는데 어찌 소승불교에서 육식을 합니까?” 하니 태국 총무원장이 대담하기를 “죽은 고기도 마음에 걸려서 먹지 못하면서 어떻게 산 고기(중생)를 제도한다고들 하십니까?" 하니 질문한 스님이 무색해 졌다 한다.

② "태국에도 도인들이 있습니까?" 태국 총무원장이 "마음이 열리고 보면 두두물물 화화초초가 도인 아님이 없지요."하여 질문한 스님이 무색해 졌다.

③ 불국사 참배때 태국 총무원장이 한국 스님에게 물었다. "대승불교가 꽃핀 한국에 와 대승선에 능통한 스님을 뵙기를 원했는데 아직도 만나지 못해 서운합니다." 라고 한국의 스님을 얏잡아 보는 언사가 깔려있었다. 동산스님의 일행을 경내로 안내하다 다보탑 돌사자를 가르키며 "저 사자는 보시오" "네 보고 있습니다." " 저 사자의 울음소리를 듣습니까?" " 내가 당신들게 선사할 것은 이것 뿐이오" 일행은 묵묵부답이었다.

④ 귀경길에 태국 총무원장이 내가 해인사에서 한 말은 취소합니다. 불국사에서 동산스님의 말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본에도 갔었지만 대승선을 섭수하고 잇는 스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돌사자의 울음이라니" 꽉 막혔던 마음이 환해집니다.

스 님이 입적하기 며칠 전에 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보살계를 주관하며 회향법문을 통하여 자신의 입적을 알렸다. "나는 다시는 이자리에 못 오르니 그동안 들은 보살계 법문을 마음에 새겨 열심히 정진하시오"라고 알렸고 자신의 영정에 이렇게 적었다 한다.

원래 일찍이 전한 바 없거니 (元來未會轉)
다시 어찌 제2신이 있으랴 (豈有第二身)
백년이라 삼천지천같이 (三萬之千朝)
다시 이놈뿐일세 (反履只這漢)
라는 열반송을 남기셨다

1941 년 3월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에서 잃어버린 종지의 회복을 제창 한 것은 동산스님 이었다. 해방후 정부에서는 불고를 늘 정치쟁점화 했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은 유시를 통하여 한국불교에 대혁명을 가져다 준다. "대처승은 절에서 몰러가라"는 내용으로 설자리를 잃은 비구승 등이 선학원 교단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때는 종전보다는 수행인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송만암스님이 선학원을 방문 비구니승들과 대화로 합의점을 찾았다. 새로이 종헌이 채택되고 종정이 송만암 부종정에 하동산 종회의장에 이효봉, 총무원장에 이청담, 감찰원장에 정금오스님이 선출됐다. 종조 문제가 야기되자 종정 송만암 스님은 결별을 선언하고 백양사로 가시자 동산 청담이 종조를 보조국사로 만암스님은 태고로 분열됐다. 이런 와중에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하여 정화에 저극 동참토록 설득한 스님은 동산스님 이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비 구승측은 독자적인 종단을 구성하고 종정에 하동산스님 부종정에 정금오 스님을 추대하고 태고사를 접수 조계사라 개명하고 서로 대결하다 양측이 분열되자 "55년 정부의 종용으로 승려대회를 통하여 새종단을 구성함으로서 동산은 설석우스님에게 종정자리를 넘겨주고 범어사로 내려간다. 다시 종단이 시끄러워지자 58년 종정으로 재추대 되어 '62년까지 불교정화에 앞장섰다. 동산스님은 범어사로 돌아와 노구인데도 불구하고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이라는 청구를 몸소 실천했다.

아 침은 흰죽으로 하고 빗자루를 들고 도랑을 청소했다. 점심공양 후에는 서예를 했고 오후 방선을 마치면 증도가 신심명 십이시송을 외웠다. 30년을 하루같이 이 글을 읽었다 한다. 취침 시간은 9시 기상 시간은 2시였다. 세수하고 법의입고는 원불앞에서 주문을 외웠다. 그것이 의아해 묻는 제자들에게 "비록 참선을 하더라도 주문을 외우면 이사면에서 있어 성취가 그 만큼 빠르다"고 했다.

이러한 수행을 따른 제자들은 조계종의 종정인 이성철스님 동국역경원장 김자운스님 김지효스님 이능가스님 불광사의 고광덕스님 등이 문하에서 배출된 스님이다. 단 스님들과 종파를 초월했고 대중불교 실현에 관심이 컸다. 이분의 가족이 현재 한 사람이 단양에 살고 있다. 두분의 아들 한분은 입신하여 동산스님을 모시고 있다가 열반하였고, 한분은 입산하였다 하산하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배운 침술이 유명하나 쓰지 않고 보시하고 있다고 단양에 거주하는 어릴적 교우 스님이 전해주고 있다.


- 소재지 : 단성면 상방리
- 년 대 : 1890
- 제공자 : 조계종 총무원(진광스님.불교인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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