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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읍

단양읍 신단양건설해준 증도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5,154

증도리는 시루섬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원주 원씨가 먼저 왔다는 사람과 김해 김씨가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이주하고 행정리만이 남아있다.
1972. 8. 19 수해때 마을전체가 참사를 당할뻔했다.

지금은 충주호에 완전히 잠겼고 마을 주민들이 5번 국도옆에 마을자랑비를 세우고 옛날을 회상하고 있다.
아직도 파괴된 잔해가 남아있는 물탱크 크기는 높이 6m, 지름이 5m정도 되는 둥근 물탱크이다,
면적으로 환산하면 16㎡에 5평 정도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시내버스 보다 작은 공간이다.
시내버스에 150명만 타면은 차가 멈출때마다 학생들이 죽는다고 소리 소리 지른다고 한다.

그 런데 237명이 어두운 밤에 겹겹이 젊은 사람이 밖으로 스크람을 짜고 발은 물탱크위에 있고 떠내려오는 부유물의 공격과 물의 유속을 참아가며 접는 부채모양으로 마을 전주민과 작업연수원생들이 2중, 3중으로 짠 스크람에 생후 3개월된 아기가 밟히고 밀리는 바람에 압사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희생된 아기의 어머님은 강했다. 마을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자기 아기는 이미 죽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도저히 자기 아기가 죽었노라고 이야기하질 못했다는 것이다.

왜 냐하면 그 판국에 나의 아이가 밟혀 죽었다 찡겨서 압사당했다 했을 때 울부짖음으로 스크람은 깨어질 것이고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나지는 아니할 것이고하여 밤새 아기를 안고서 속으로 울었다 한다. 아침에 헬기가 와서 구조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서 압사당한 3개월짜리 아기의 시신을 확인했을때 237명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다. 수몰된지 8년만에 1989. 8. 19. 수몰 8주년을 맞이하여 마을자랑비를 이주주민 54가구가 자금을 염출하여 비문을 새겼는데 다음과 같다.

증도리 마을 자랑비

애담이 경승지라 퇴계이황 선생 인증하고 쏘갈바위 구두여울 선유절경 경탄하네 윗송정 맑은 물을 황준량선생 극찬할 때 현동자의 기행문은 신선에 근원지라 감탄했네 김일손에 서홀암에 돌병풍이 퍼졌구나 72수해때는 237명이 남한강의 범람으로 여섯평의 물탱크에 살과 이마 맞대고서 구원의 손길 기다리던 곳 날이 밝아 구출되니 어린생명 압사희생 되고 오늘날에 남은 우리들 85 충주댐 건설로 시루섬이산이 웬말인가! 증도리에 내살 파다가 신단양을 건설했네 겨레의 젖줄속에 담겨있는 증도리야! 너라도 내가 숲속에 영원히 남아 주려무나 1993年 8月 19日 수몰로 이전된 증도리 주민일동이 세우다.

글쓴이 : 단양읍 윤수경

제막식날. 마을자랑비문 설명을 듣고 참석자 모두가 85. 수몰로 고향의 잃음과 72. 8. 19 수해때 3개월된 아기의 죽음과 살아남은 재활의 기쁨과, 물속에 있는 고향땅을 생각하며 300여명의 참석자 모두가 부등켜안고 재회의 눈물을 흘렸다.



- 소재지 : 단양읍 증도리
- 제공자 : 단양읍 상진리 이창수(새마을지도자 단양군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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