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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동리

연혁

  • 삼한시대는 마한의 영토였다.
  •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의 땅이었으며, 삼국이 통일한 후 통일신라에 속하였다.
  • 고려 때는 강원도 원주목의 속현으로 있다가 조선 태종 때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만리(九萬里)를 병합하여 평동리라 해서 매포면에 편입되었다.
  • 1980년 매포읍 승격과 함께 매포읍 평동리가 되었다.
  • 1985년 충주댐 수몰로 인구가 증가했고, 1988년 공해보상가구 이전, 1990년 수해보상 이전으로 우덕 2,3리가 옮겨왔다.
  • 1976년도에 매포읍사무소가 옮겨와 매포읍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

특성

  • 단양군 북면-북이면(北二面)의 지역으로 들 가운데가 되므로 들골 또는 평동(坪洞)이라 하였다.

산천 및 지명유래

  • 마시골산 :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하는데 멧돼지가 가로막아서 못 잡아먹었다.
  • 안잘미산 : 앗잘미. 살인을 싫어하는 길지를 뜻함.
    서울을 정하려 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안잘미산이 들어서 도읍지가 안 되었다.
  • 가삿말 : 평동리의 중심지.
  • 각시봉 : 각시가 뽕따다가 피곤해서 졸다가 발을 헛디뎌서 빠져 죽었다는 각시바위가 있다.
  • 각시바위 : 도서관(앗잘미) 뒤. 부흥바우 동쪽에 있는 바위. 족두리를 쓴 각시처럼 생김.
  • 도싯골 : 평동에서 도곡으로 가는 골짜기.
  • 도곡천(道谷川) : 도곡에서 발원하여 우덕교 동쪽에서 매포천으로 들어감.
  • 풍미당골 : 풀미당. 깨배이재 북쪽에 있는 골. 송재문 씨(84세)가 약물을 먹고 속병을 고쳤다함.
  • 가장골 : 열무실 위쪽의 골짜기 마을.
  • 작은마시골 : 절이 있었다 함.
    물이 많아 대문짝으로 막으면 다른 데로 물길이 이동한다 하여 막았더니 중학교 다리 밑으로 나왔다 함. 실제 다리공사 때에 용솟물이 확인됨.
  • 돌보 : 소나무와 돌로 물을 막아서 쓰던 보로 한바들에 있었다.
  • 구수막골 : 쇠시골의 북쪽으로 깊은 골짜기이다.
  • 평동리의 형극 : 마시골산은 뱀, 가삿말 뒷산은 산돼지, 안잘미는 개구리로 비유됨.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하나 멧돼지가 가로막아 못 잡아먹는다 하며, 약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 부자가 되도록 산이 재앙을 막아 준다고 함. 충주댐 수몰과 한일·성신의 분진으로 이주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데 이들의 재앙을 막아주는 곳으로 해석함.
  • 기리골 : 길이골. 골짜기가 길어서 붙여진 이름. 옛날에 절터가 있었고 기와장이 출토됨.
  • 새밭양지 : 산이 높고 깊어서 명산. 일본인들이 풍수지리설을 인용 혈을 박은 곳이 있다.
  • 신랑바위 : 남자 바위가 있었다. 사모하다가 원한 관계가 있어 죽었다.
  • 부흥바우 : 봉바우. 용장들 남쪽 가에 있는 바위. 부엉이가 새끼를 쳤다 함.
  • 돌고개 : 깨배이재에서 하시 양짓말로 가는 고개. 돌이 많음.
  • 절고개 : 절골에서 적성 대가로 가는 고개.
  • 떡골 : 옛날 길손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백설기를 하여서 팔던 골짜기.
  • 자살고개 : 앗잘미 각시봉. 과부·홀아비가 난다하여 장가·시집가는 가마가 용장들로 돌아서 감.
  • 사기장골 : 옛날 그릇을 구어서 팔던 곳으로 사기가 출토된다.
  • 이상문 효자각 : 순조 때 건립된 효자각.
    부모 병환에 꿩고기와 겨울 복숭아, 겨울 딸기, 여름 얼음을 찾아드려 병환을 낫게 했다하며 복숭아씨를 가보로 보관하고 있음. 1827년 11월 6일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순조 대왕이 조봉대부의 관직을 내리고 이어 어명으로 1832년 8월 15일 평동리 663번지에 효자각을 세웠으나, 1994년 도시계획으로 현 위치로 이건함.
  • 전의이씨 열녀각 : 이민렬(李民烈)의 처 전의이씨(李氏)의 열녀 비각. 1837년 건립.
    전의이씨는 1812년 부유한 상인의 무남독녀로 자라 이민열과 결혼하였다. 남편이 상업으로 집안을 일으키고자 남원 땅에서 개성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객사하자,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시기 위해 남장하여 평동까지 옮겨와 장사 지내고 3년 간 움막을 짓고 남편을 섬긴 공이 사표로 여겨져 정려되었다.
  • 조산더미 : 매포 청사 이전 전까지만 하여도 읍사무소 정문 앞에 2m 정도의 돌 더미가 있었다.
    고려 중엽에 평동 조씨 10여 호가 살았는데 어느 봄날 탁발승이 시주를 청할 때 퇴비를 바랑에 담아주었다. 이에 탁발승이 서낭당 앞에 여섯 자 넘도록 돌을 쌓고 흐르는 냇가에 우물을 파면 번창한다 하니 욕심 많은 조씨가 두 개의 돌무더기를 쌓고 우물을 판 후 몰락했다고 한다.
    이는 평동리가 행주형국으로 무거운 짐과 배 바닥인 땅을 파면 침몰한다는 이치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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