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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면

적성면 각시봉과 도마이굴의 전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7일 0시 0분 0초
조회
6,338
원래는 부자였으나 두 내외 인정이 후하기가 이를데 없어, 오는사람, 가는사람, 굶는사람, 병든사람, 이래 저래 다 나눠주다 보니 그 많던 재산이 거덜난 것이다. 아들만 5형제 였는데, 하나같이 제 부모를 닮아 모진데 없이 다정했다.

양식도 어렵고 살림살이도 쪼들릴 대로 쪼들리는 판이라 이젠 고만 생산해야지 하는 생각이야 굴뚝 같았지만 어찌하랴. 가족계획은 고사하고 다산이 복 받던 시절이었으니, 더구나 잠도 배부른 놈이 깊게 잔다고, 멀건 죽 한사발로 물린 저녁상이고 보니 초저녁 기척도 하기전에 잠은 멀리 도망쳐버렸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긴긴 밤 그저 남녀지간에 그런 일밖에 더있겠는가. 태몽이 있었는데 참으로 요상한 것이 용도 아니고 배암도 아니었으니 내내 뒤숭숭한 꿈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집 아낙네, 부탁하는 처지에 차마 빈손으로 가기도 뭐해 잿밥으로 남겨둔 쌀되박을 어깨춤에 안고 웃실 태주무당을 찾았겠다.

태주무당이라고 하면 무당 중에서도 동자신을 모시는 무당으로 일부러 어린애를 굶겨 죽여 원귀를 빙의케하던가 아니면 어린애 손가락을 작두로 잘라 갖고 다니는 좀 끔찍하고 잔혹한 무당이 일렀다. 그러나 그 효험은 영특하였고 특히나 태몽이나 어린애들의 병치레를 다스리는 다른 어떤 박수나 무당보다도 뛰어났다. 그 태주무당이 말하기를 "당신네 집에 곧 출산이 있을 것이다. 태어날 애기가 고추인지 숯검댕인지는 말할 수 없으나 거두 절미하고 내가 이르는 말을 정히 지켜야만 무탈하게 살려낼 수 있다. 하기가 힘들면 그냥 두어야지 안쓰럽다고 중간에서 포기하면 만사휴지가 될 것이다. 행할 자신이 있느냐?"

그 아낙, 고개만 끄덕일 뿐으로 그저 한숨이다. 한입이 더 불어난다니 그러잖아도 개미같이 간당거리는 허리끈이 아예 두 동강으로 부러질 판이었다. "애기를 낳으면 엎어놓아라. 삼칠일이 지나기 전엔 절대 안아주거나 뉘여선 안된다." 태기가 있었고 출산이 따랐다. 그날은 바로 절기로 치자면 대서요. 절후로 치자면 중복이 가까운 칠월 칠석날이었더라. 금줄이 걸렸는데 숯검댕이였다. 고추는 아닐지라도 경사는 경사였다. 그 어미 딸자식을 기르매 태주무당의 말을 명심했다. 엎어놓기를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커녕 숨마저 끊어질 형국이었다. 그래도 안 된다고, 그 어미 어금니를 욱신 물고는 참고 참아냈다. 명줄이 길기는 긴 계집이었다. 사칠일이 다 지나도록 목숨이 붙어 있는게 용했다.

이제 오늘로 마지막 하루가 남은 셈이다. 창창하던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일더니 번개가 날았다. 천둥이 산을 쪼개고 벼락이 물길을 끊었다. 우르르...!콰쾅 쾅! 콰쾅! 갑자기 온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소나기가 장대살로 퍼붓기 시작했고, 천지가 개벽할 듯이 번개와 천둥이 번갈아 들이쳤다. 우우...웅! 쿠르르 쿠엉! 천둥소리도 같고 맹수의 울음소리도 같은 참으로 이상한 소리가 창호지를 바리바리 떨게했다. 너무나 기괴한 울음소리에 기절초풍할 듯 놀라는 그 어미였다. 어미가 까무러칠 듯 놀라 자빠지자 이제껏 죽은 듯이 축 처져있던 어린 핏덩이가 응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게 아닌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찌 20일씩이나 엎어져 있던 갓난애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울수 있다니!

번쩍! 콰과쾅...! 번개가 일고 벼락이 앞마당에 있는 대추나무를 때렸다. 그 어미가 화들짝 놀라며 갓난애를 끌어안는 순간 세상천지, 언제 그랬냐 싶게 쾌청하지 않은가. 한 순간 먹구름이 싹 가시고, 다시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그 애가 컸다. 물오른 버들같이 열여섯이 되었다. 이름은 상녀라고 했다. 집안이 가난하기는 여전했다. 적선지가에 심우서경이라고 하나 그도 거짓말인가 보다. 5형제가 장성하여 다들 일가를 이루었으나 뿔뿔이 헤어져 소식조차 막막하고, 이젠 아비 또한 연로하여 운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근근부지 모아둔 재산 또한 후덕한 인심으로 날려보냈다.

가난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두모녀 누에를 쳤다. 그애 이름을 상녀라고 한 연유이기도 했다. 춘잠이 있고 추잠이 있는데, 봄누에 치는 것을 춘잠이라고 했다. 지글거리는 태양이 바야흐로 칠월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물이 생육하는 초여름이었다. 전답이 없는지라 상전이 있을리 없었다. 도리없이 산뽕나무에 매달려야 했다. 기름지고 야트막한 산은 남아나질 않았다. 작잠을 하는 집이 상녀네만 있는것도 아니요, 또한 한창 식성이 좋을 막잠 때인 것이다.

이만큼 키워온 누에인데 방잠(뽕잎이 모자랄 때 뽕나무 위에다 그냥 누에를 올렸음)할 수도 없고 생각다 못한 상녀가 다래끼를 허리에 둘렀다. 산을 돌면 물 깊은 곳에 절벽이 있었다. 그 절벽에는 유난히 뽕나무가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에를 굶기면 굶겼지 그곳에 오르기를 꺼려했다. 천야만야한 낭떠러지 절벽인 탓도 있었지만, 그 밑에 있는 용소는 언제 봐도 음험하고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었다. 물이 빙빙 도는데 도저히 그 깊이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물빛은 언제나 시커멓고, 한가운데가 불그스름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산을 돌아가다보면 그 산 밑엔 커다란 굴이 있는데, 당장이라도 요망한 귀신이나 괴물이 불쑥 튀어나올 듯이 침침하고 괴괴했다.

마른침을 꿀꺽삼키며 그녀가 낫을 집어들었다. 여린 마음에 자신이 절벽에 떨어져 죽는 한이 있어도 어린 누애들이 말라죽은 꼴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일이었다.

휴우...! 상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되었다. 좀 힘들긴 했지만 뽕잎이 다래끼에 가득했다. 이젠 가야겠다고 막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상녀의 몸이 기우뚱했다. 아아악! 그녀는 아뜩해지는 의식을 일으켜 세우려고 발버둥쳐봤으나, 그럴수록 저 밑 어딘가로 곤두박질 쳐졌다.

아! 이게 끝이구나, 짧은 세월 가난에 서럽기만하던 열여섯 해가 빛살처럼 펼쳐졌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모든 걸 포기한 그녀가 편하게 눈을 감았다. 그때 투둑둑... 툭!하는 나무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몸뚱이가 용수철처럼 불쑥 튀어오르는가 했는데 거기쯤에서 딱 멈추었다.

.....

눈을 번쩍 뜬 상녀가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한숨을 내쉰 그녀가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몸서리를 쳤다. 절벽 끝으로 노송이 있는데 자신은 그 나무의 썩은 옹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도 찢어진 치마폭에 간신히 걸려있어 살랑바람만 불어도 당장 떨어질 위기였다. 살아있긴 했지만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였다.

바로 그때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잠자코 정신을 가다듬자, 절벽아래에서 부터 니글거리는 비린내가 솟아오르는게 아닌가. 아니 이게 웬걸. 갈수록 태산이라고 용수 저 밑에서 불그스름하니 거대한 물체가 꿈뜰꿈뜰 용트림했다. 이무기였다. 아가리를 딱 벌린 놈은,눈에선 붉은 핏발이 섰고 붉은 수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한발에 뛰어오를 기세였다. 찰나, 불그스름한 안개가 꾸역꾸역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대지를 뒤덮어 버리는게 아닌가. 쿠우 왕! 적룡이 아가리를 딱 벌리며 불을 토했다. 핏발 선 눈에선 자광이 칼날처럼 쏟아져나왔다.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눈을 뜨려다 이런 섬뜩한 광경에서, 기절초풍 자신도 모르게 고만 아아악! 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으니...

그바람에 옹이가지가 뚝 꺽여나갔고, 그녀는 절벽 아래로 다시 곤두박질쳤다. 실로 절대절명의 순간! 아아! 이는 또 어인 조화란 말인가.

그녀가 적룡의 아가리를 향해 막 떨어져 내리려는 찰나, 산 밑 동굴 쪽에서 냉엄한 한기가 창날처럼 쏟아져 나오더니, 천지개벽할 만한 진동이 일어났다. 크아아! 크앙! 눈부실 정도로 한기가 도는 흰 빛 거대한 물체가 꿈틀하는가 했는데, 놈은 눈깜박할 사이에 벌써 용소머리에 당도해 있질 않은가 실로 기상 천외한 비법이었다. 나는 새도 그렇게 빠르지 못할것이었다. 놈이 백색 안무에 가려있던 긴 꼬리를 냅다 휘두르자 막 적룡의 아가리로 빨려들던 상녀의 몸이 가랑잎처럼 날렸다. 그녀가 눈을 떴을땐 실로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 마리의 적룡과 백룡은 서로 뒤엉켜 죽어 있었는데, 그 거대한 몸집이 걸레조각처럼 너덜거렸고 허연 뼈가 모골송연하도록 내비쳤다. 그런 끔찍한 광경을 망연자실 쳐다보던 그녀가 소르라치게 놀랐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산 같은 두 마리 이무기의 싸움 한복판에 팽개쳐 있던 자신의 처지로 본다면 당연히 다리뼈 하나쯤 부러져 있어야 마땅한 것이건만 생채기 한군데도 없었으니, 그러나 그녀는 이무기의 사정을 몰랐다. 두 마리 모두 천년을 넘긴 이무기였다. 용으로 승천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 용으로 변하자면 동정을 간직한 처녀와 결혼을 해야 했는데 마침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몸이 비록 인간의 몸에 불과 했지만, 자신들의 배필이 될 몸이요 또한 천상에 올라가서는 지고무상한 천녀가 될 신분인지라 서로가 죽기로 싸우면서도 그녀에게만은 털끝만한 상처도 내지 않은 거였다.

그런저런 사정을 알리 없는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막 발을 떼는데 무언가 번쩍하고 빛났다. 주먹만한 물체 두 개가 하나는 백광을 또하나는 홍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두 이무기의 입에서 굴러나온 여의주였다. 승천을 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완전한 여의주는 아니라 해도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진 보석이었다. 그녀가 그걸 집에 갖고 왔을 때 비로소 하늘이 말갛게 개었다. 물론 그녀는 그 두 개의 보석으로 부족함 없이 여생을 마쳤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어미가 삼칠일의 맨 마지막에도 그녀를 안아들지 말고 그냥 엎어놨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그녀가 떨어진 벼랑을 각시봉이라 한다. 그 밑엔 지금도 붉은기가 도는 용소가 있다. 흰 이무기가 나온 산밑 동굴은 각시봉으로부터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도마이굴이라 불린다. 적룡과 백룡이 뒤엉켜 싸운 들판이 각시봉 바로 앞에 있는 들인데. 사람들은 아직도 이곳을 용장뜰이라고 부른다.

- 체보자 : 문 상 오
- 각시봉과 도마이굴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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