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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상천면

어상천면 효자문 거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7일 0시 0분 0초
조회
3,840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2리 효자문 거리는 양천허씨(陽川許氏)3대에 걸친 효성을 기념하여 세운 효자각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허 증(許 憎, 號는 尙?, 字는 聖居)은 조선조 순종조에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학문이 높았으며 효행이 지극하였다.

그의 부친이 이질에 걸려 위태롭게 되자 밤낮으로 그 부친의 대변을 혀로 맛보면서 간병하였으며, 의원에게 치료할 방법을 묻자 의원은 산삼 이외에는 명약이 없다고 하였다. 마침 이 때는 장마철이라 홍수로 강물이 넘치고 냇물이 크게 불어나 건너갈 방법이 없었다. 이에 물가에서 크게 통곡을 하고 있으려니 홀연 세 개의 산삼이 떠내려와 부친께 갖다드린 즉 병이 나았다.

또 어머니가 눈병이 나서 앞을 전혀 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자 혀로 어머니의 눈을 씻어서 낫게 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부친이 임종지간에 이르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부친의 입에 흘려 넣어 여러 날을 연명케 하기도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아들 헌(憲, 號는 鶴齊, 字는 亨三)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구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부친이「어찌 내앞에서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느냐」하고 꾸짖어 감히 실행하자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장례를 치른 후 형과 동생은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홀로 묘소에 남아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계속 곡을 하고 있어 눈물이 옷깃을 다 적시었고 폭우가 내리는 중에도 상복이 젖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부친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너는 몸이 매우 약하니 내가 죽은 후 여막(廬幕)을 차리지 말라. 너무 지나쳐 몸을 상하게 함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부친도 아들의 효성이 지극함을 알았고 부친 또한 지극히 자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시묘하던 중 추운 겨울에 한자나 쌓인 눈을 쓸고 밤새도록 엎드려 있었으나 춥고 주린 기색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참으로 효성스럽구나. 전에는 큰비가 와도 옷이 젖지 않더니 나중엔 큰 눈이 와도 추위조차 틈타지 못하는 구나」라고 하였다.

허 한의 아들 원(瑗, 號는 三玉, 字는 敬玉)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生년(丁未)에 태어난 그는 우리 민족사상 유례없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민족 얼과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힘써 왔으며 높은 한문학과 덕망으로 일찍이 영춘향교의 전교를 맡아 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충효의 사상을 지도하였다.

또한 한의학에도 밝아 부모님의 병환을 극진히 돌보아 드렸으며, 탁월한 효성으로 충청북도지사, 단양군수, 유림 등으로부터 많은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89세가 된 1995년 4월 14일 양천 허씨 문중과 영춘, 단양, 제천 유림들과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의 효행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 소재지 :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2리
- 제보자 : 어상천면 임현1리 허 원(73)
- 체보자 : 어상천면 안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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