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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면

가곡면 의병 장오용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3,792
조선 순종 1년 정미(1907년), 가곡면 어의곡리에 의협심이 강하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충성심이 강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또, 사사건건 일본이 나라일에 간섭하여 주권을 마음대로 행사못하는 당시의 대한제국을 원망하면서도 나라에 힘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고 마을 젊은층 에서도 독립의 중요성과 자립만이 살길이며 일본사람들의 무력적 침략행위를 단절시켜야 한다 고 생각하던 마을 청년들이 많았다. 그중 청년 장오용의병은 어의곡 출생으로 당시 나이 20세의 젊은 나이에 부인 신씨와 결혼하여 신혼 살림을 차리고 있었으며 적은 농토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는 농부로서 땀흘려 지은 농사를 의병들에게 대접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고 오늘도 여느 때처럼 새벽같이 산 화전에서 재배한 콩을 꺽어서 쌓아둔 콩가리에 콩을 지러 산으로 가던중 소백산 민백이제를 넘어가는데 영주, 순흥 수비대소속 일본헌병이 대열을 갖추고 20여명이 총을 메고 마을로 잠입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고가던 지게를 내던지고 마을로 온 힘을 다하여 달렸다. 일본 헌병이 의병의 초병임을 알고서 추격하기 시작했다. 민간인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어의곡을 기점으로 죽령 의풍에 의병이 있다는 확실한 정보로 밤을 세워가며 영주헌병대와 단양헌 병대가 잠복근무하면서 합동작전을 벌여 의병 20여명을 일망 타진하고자 포위망을 압축하고는 긴박한 상황에서 일본 헌병들은 공격을 위한 전투대형을 갖춘 찰라였던 것인데 장오용 의병이 "왜놈 수비대가 토벌하러 온다. 의병들은 총과 문서를 가지고 산으로 피하시오." 왜놈수비대가 온다고 몇번이고 고함을 치며 마을을 두어차례 뛰어다녔다. 새벽공기를 가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동네 사람들은 다들었으나 벌벌 떨기만 하고 문밖도 나서질 못했다. 장오용 의병의 고함에 단잠에서 깨어난 의병들은 입초의 신호와 작전 신호로 모두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산과 나무, 바위에 은폐하여 응사하자 일본 헌병들도 몸을 숨기며 응사하는 일대 교전이 새벽에 벌어졌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초가을 단풍과 산이 울창한 숲쪽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평소에 다니던 은익도로로 의병은 무사히 난을 피하고 한사람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거나 희생되지 아니하고 20여명이 도피하였다. 이에 화가난 일본 헌병들은 마을사람들을 닥치는데로 의병들을 숨겨주었다하여 발로차고 구타 하기 시작했고 장오용 의병만이 남아 무기도 없는 지라 정유복씨 집 뒤안으로 피신하였으나 마을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 붙잡혀 칼로 배를 찔리고 가슴, 다리, 목을 찔리며 의병과 내통한 연유를 자백하라고 회유도 하고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끝까지 대한의 독립과 의병으로서의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항거하고 비밀을 말하지 아니하자 항거한다고 총으로 머리를 쏨으로써 장한 일생을 마치었다. 또 현재 가곡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안정수(52세)씨의 증조할아버지(안두호 또는 광두)와 할머니(한양 조씨)는 헌병들이 온다고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다하여 팔을 총으로 쏘아서 평생을 두분모두가 불구의 팔과 다리를 가지고 살다가 돌아가셨다하며 장렬히 최후를 마친 장오용의병의 전사일은 1907년 음 9월 5일이며 어의곡리 현 안정수씨집에 안광두(1864년생 당44세)와 김재경(현71세)의 외할아버지인 강수백씨는 이종사촌간이였고 인척과 친척들이 이심전심으로 의병활동을 했다. 일본군을 몰아내는 이야기를 저의 아버지와 셋이서 밤이 으슥하도록 이야기하고 이야기할때는 방에 불을 켜고는 문을 자리로 가리고서 밖에 꼭 입초를 세워서 비밀이야기를 했는데 당시의 비밀이야기는 의병의 활동상황과 지원대책 각 읍내의 악질과 친일파의 구역질나는 아첨, 의병나간 가족의 멸시, 의병가족의 고발, 의병의 활동자금 모금방법과 연락무기의 반입과정등에 관한 밀담을 나누었다고 부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장의병이 죽고나자 누구하나 친일파의 눈초리 때문에 선듯나서서 장사 지내지 못하다가 마을에서는 꽃다운 나이인 20세에 인생을 마치고 의병 20여명을 구하였으니 장한 생각이 들어 마을에서 몇사람이 야간에 양지쪽에 장사지내 주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토지는 어의곡리 답325번지 595㎥ 답 329번지 298㎥이다. 젊은 부인은 개가하고 묘를 돌볼 사람이 없자 마을에서 묘답으로 정하여 마을전체가 90년간 제사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친일파가 무서워서 늘 9월 4일 밤에가서 지내기도 하고 새벽에 풀베러가는척 하면서 일본을 미워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냈는데 90년을 한번도 빠져본적이 없다 한다. 그런데 요사이 와서는 걱정이 생겼다. 김재경씨(전직 리장 현71세)는 7세때에 아버지에게 들었고 또 제사를 주관이 되어 지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제사지낼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나는 평생을 부끄럽게 살고 70평생을 불구로 지낸 사람도 있는데 장오용이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것도 아무런 인척관계도 없는 의병 20여명 을 살리려고 죽었으니 내가 죽은후라도 제사만은 네가 맡아서 꼭 지내도록 하라"고 유언처럼 이야기하여 현재까지 지내왔다. 내가 죽으면 제사 지내줄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자기 부모제사 금초도 안하는데 알지 못하는 의병제사를 누가 지내주겠냐는 것이고 또 아평∼새밭간 도로포장 공사가 되면서 의병 장오용씨 묘가 도로로 편입되어 이장비 20만원 을 수령할 사람이 없어 무연분묘로 처리되는 것이 안타까와서 김재경씨가 10여일을 다니며 수소문하여 서류를 갖추어 수령하였으나 묘자리가 없어 김재경씨 밭에 묘를 쓰고는 이장비로 10만원을 쓰고 잔액 10만원과 김재경씨가 20만원을 보태어서 30만원으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토지대장상 논인데 밭으로 지목변경하고 밭을 정리하여 영원히 밭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여주면 이묘는 묵지 아니하고 마을의 영원한 나라 사랑의 산증인이요, 충성의 귀감이 될것이라고 아쉬워 하고 있다.

김재경씨는 늘 밤에 가만히 제사지낼때에 아버님이 축원하는데 "장오용 의병님이시어 ! 신은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쳤지만, 후세인 우리의 부끄러운 부탁입니다만 우리마을에서 전쟁마당에 나가는 젊은이에게 항상 당신이 각별히 보살피어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부모형제를 만나볼수 있게 해 주소서" 라고 제사를 지내서 그런지 대동아전쟁 징용, 6. 25사변때 어의곡 255호의 청장년은 손가락하나 다친 사람이 없다. "이거참 이상한거여"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전혀 이해못하고 텔레비젼 연속극만치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quot; 두필지의 토지를 옥토로 만들고자 군에 이야기하고 군의원에게 부탁하여 무리하게 군청장비를 쓰다가 장비의 큰손실을 가져와 이제는 관청에 부탁하기가 무척 쑥쓰럽다고 하며 그러나 마을의 상징인 장의병 묘소와 위토만은 죽기전에 잘가꾸고 장오용 명의로 해서 마을에서 영원히 제를 지내 주었으면 하는것이 소박한 소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두번의 탄원서를 군에 내었으나 무명용사, 무명의병이라 하는데 기분이 안좋았고 이러한 대우라면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느냐며 이제는 지쳐서 포기한 상태이나 글로 남겨 후손에게 전하고 인동장씨 후손이 돌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 소재지 : 가곡면 가대리
- 제공자 : 가곡면 어의곡리 김재경(남71세)
- 체보자 : 단양읍 윤수경('95.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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