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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면

대강면 상원사 동종도 울고넘는 죽령고개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4,031

죽령은 신라 아달왕 5년(158년) 죽죽에 의하여 개통된 이래 숱한 사연을 남기며 1840여년간을 말없이 버티고 단양과 희로애락을 함께하여 오고있다.

이 고개는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의 서쪽과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한강을 장악하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개통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건국이념인 유교사상의 시원지 영남지방의 양반과 생원, 진사대감의 행차길이었고 영남에서 서울로 공물과 진상품을 수송하는 통로였다. 또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조령을 넘으면 관직의 명이 길지않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이화령과 죽령을 많이 넘었다하며 죽령도 대나무같이 미끄러져 과거급제가 어렵다는 설이있으나 대쪽같이 곧은 절개와 신의를 생각하며 많이 넘었다는 설도있다.
조선 세조때에 안동도호부남문루에 있던 동종(3천3백근)이 오대산의 상원사로 옮겨가기 위해 죽령을 넘을 당시 눈물겨운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 동종은 경주의 에밀레종보다 100여년 앞서 주조된 것이라하며 금.은.동.주석을 녹여만든 종으로 높이 1.4M, 직경 1.2M로 용신을 틀로 하여 사방을 구분할 수 있는 비천선녀무늬가 있고 사방에 각각 가로 세로 3개씩 불교에서 쓰는 3자삼삼으로 배열된 젖꼭지 36개가 돌출하여 종의 청아한 울림을 떨리게 잡도록 함으로서 은은하고 끊어질 듯 하면서도 백리까지 울려 퍼졌다한다

원래 절의 범종이었는데 조선초기 억불정책으로 절이 쇠퇴하자 안동도호부의 시간을 알리는 관가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한다. 그러던중 세조가 등극한 뒤 12년후인 1466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위의 상원사를 확장하고 임금의 원당사찰로 만들면서 전국에서 가장 소리가 좋은 종을 찾기위해 상원사운종도감의 직책을 주어 전국을 수소문하던중 선택되었다 한다. 3천3백근의 종을 나무수레에 싣고 500여명의 호송원과 100여필의 말이 끌어 상원사로 옮기던 중 죽령고개를 10여M 남겨두고 종이 꼼짝하지 않게되었다.

죽령고개를 넘느라 힘이 빠져서 그렇겠지 하였으나 5일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아 묘책이 없었다. 운종도감은 묘안을 생각하던 중 100살도 못사는 사람도 고향 떠나기를 아쉬워 하는데 하물며 800살이 넘어 숱한 애환을 지닌 범종이 죽령만 넘으면 다시는 못 볼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움직이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36개의 젖꼭지 중 한개를 잘라서 고향으로 보내 안동남문루밑에 묻고 정성껏 제를 올린 다음 죽령에 돌아와서 "이제는길을떠나시죠."하며 종을 당기니 그제서야 움직여 단양을 거쳐 제천, 원주, 진부령을 넘어 상원사에 안치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 소재지 :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
- 제공자 : 영풍군 풍기읍 성내동 194 우종태(65)
- 제보자 : 단양군청 윤수경(8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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