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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면

단성면 우화교 기사비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4,088

옛날에는 홍수가 났다하면 컸다. 그래서 다리를 안놓을 수는 없구, 건너 다니는 돌다리는 물이 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 이 우화교는 단양 읍내를 연결하는 다리기도 했지만 죽령고개를 넘어온 경상도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서 충주쪽으로 많이 가는 대로(大路)의 큰다리야! 나무를 베어서 다시 놓는 꺽쇠로 고정하고 동바리를 바쳐서 건너 다니는 다리가 물이 나가면 부역을 내어서 다시 놓는 것이 고작이였지. 그리고 양쪽의 난간은 전혀없지. 나무로 놓았으니까 발이 빠지기도 하고 술을먹고 헛디뎌서 떨어져 다치고 죽은 사람이 많았지! 지금은 배에 기름기가 있지만 그때는 삼시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때니까
술이 들어가면 정신이 없거든 뱃속에 기름 기가 없어 못 먹어서 말이지 ! 그래서 다리를 건너다가 단양 사람이 많이 상했지. 또 외지인도 많이 다쳤데. 지금은 우화교가 218m로 건설되였지만 그때는 얼마나 이 다리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고 다쳤으면 군수가 돌다리를 놓고서 기념비를 세웠겠어! 그때에 다리의 이름을 짓는데 말이 많았었는가봐. 단양천이니까 단양천 이야기도 나왔겠지만 그때의 이곳의 경치는 다리위에서 소금무지산쪽을 바라보면 수양비들과 느티나무가 양쪽으로 꽉차 있고 한강쪽으로 금수산과 아름드리 느름나무가 꼭배겨 서있고 그 아래로 단양천 물이 흘러가니 그 물을 그냥 퍼 마셨고 여기서 쌀도 씻었고 채소도 다 씻어먹던 단양 사람들의 음료수였지 이렇게 주변 경관과 경치가 좋으니 이 다리를 건너면서 주변의 경치를 즐기자면 우화등선이라 날개를 달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려면 날개가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고 또 다리를 새로히 건설하고서는 한사람의 희생자도 없어야 되겠다는 것이 당시 군수의 생각이였던가봐

그래서 의견을 모아서 명명한것이 우화교이지 또 혹시나 다리에서 떨어지더라도 날개를 달고서 사뿐히 떨어지면 무사할거라는 생각도 깔려 있었지. 그래서 그런지 우화교라고 명명한 후로는 다리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고 하는 구만. 그래서 그때부텀 우화교가 된기여, 그리고 이 비문을 단양서 판독하는 이가 없어 젊은이들이 판독해야 된다고 한다.

체보자주 : 우화교 기사비는 지방 문화제 80호로 지정되어있고 조선 영조 29년 (1753) 제 108대 단양군수였던 이기중선생이 단양천에 건립하고 비는 1754. 6. 15일에 세웠다. 문화제 공식 명칭은 우화교신사비이나 탁본하여 판독한 결과 우화교기사비였으며 이비석을 탁본하여 원본을 확인한바 비문을 쓴 사람은소화선인 宜寧 南有容이며 교량현장 감독 설게자, 목수, 석공, 재정건립자 승려들이와서 준공식에 염불을 하는등 재미있는 비석이며 단양의 명품이다. 우화교의 비문을 탁본하여 수소문하여 원문을 실었다.


- 소재지 : 단성면 중방리
- 년 대 : 조선 영조 29년(1753)
- 제보자 : 단성면 가산리 장영식
- 제공자 : 단성면사무소 윤수경(199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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