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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읍

단양읍 나라의 변란을 알아보는 수촌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4,942

금곡리는 금광이 있어서 금곡이고 천동은 샘이나서 천동이요. 수촌은 본래가 물알이 (물이 사물을 알아 본다는 뜻임) - 물안니 - 수촌이 되기까지는 유래도 많고 사연도 많다고 한다.

마을이 생겨나기는 400여전에 생겼고 마을에서는 정월 보름날 날을 세워 가면서 제사를 지냈는데 처음에는 저녁을 일찍먹고 소백산 1000m 가까이 올라가 낮에도 가면은 으스스한 산지당에서 제사를 먼저 지낸다.

이유는 산 아래 사니까 소백산이 잘 보살펴 풍년이 들게하고 3재가 들지 않게 해달라고 재물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음 큰 나무아래 아직도 다썩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구수당(산지당의 구터로서 마을에서 가깝고 암반이 깔려있어 제사 지내는 자리로 좋음)에서 지내고 세번째로 마을 어구의 성황당에서 재사지낼 때는 그래도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집집마다 소지한장씩을 올려주고 나면 첫닭이 울고 새벽이 가까워 진다.

이때는 네번째로 노다리 (나무로 만들어서 건너 다니는 외나무다리)에서 다리가 오래가고 여기에서 어두운 밤에도 또는 짐을 지고 또는 소를 몰고 오는사람이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고 40년 전만해도 제사를 성대히 지냈다. (당시의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제문은 6.25때 타 버리고 신명중학교 창립자 우선덕씨가 옛것을 기억하여 쓴 것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나라의 정난, 변고, 정세를 잘 알아보는 물(水)에 대하여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수촌의 물도 세월 따라서 그 탁도나 빈도가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6.25사변이 터지고 7일간은 붉은 황토물이 금곡까지 흘러가서 무슨일이 일어났느냐고 온 주민이 놀랐고 도랑물이 아주 진흙탕 물이었다고 하고 4.19혁명때에는 붉은 물이 3일간을, 5.16혁명때는 5일간을, 10.26박대통령 시해 사건때는 5일을 흘러서 먹던 물이였는데 손도 못씻을 정도로 흐렸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무슨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깨끗한 물이 흘러간다. 또 "4, 5, 6공때 학생데모때 보면 몇일만큼 쓱 흙탕물이 나오건든. 그후에야 드리믄 나라에 변고가 있었다는구만."참 거외 비양기 떨어질 때 하구 바다배 침몰때하구 삼풍사고때도 흙탕물(血水)이 나왔어. 짧은 것은 12시간 정도니까 밤에부터 시작해서 아침에 끝나면 못 볼때도 있지"누가 물 나오는 것 보고 있을새 있어 늙어도 일해야지"어쩌튼 소백산아래 영험한 마실이여 영춘쪽에는 9봉8문이라하지 ( 이곡,밤실,여의생,뒤시랭이,덕가락, 곰절, 배골, 귀기, 새밭) 만 13통 12문 ( 마조의 마생이 세골, 수촌미륵이, 감투) 이라고 하지."그리구 당시 제물은 살은 돼지를 지고 올라가서 산에서 잡아 튀하여 통체로 무릅을 끓어 놓고 제물로 썼고 세옹매, 시루떡, 밤, 대추, 꽂감, 북어, 조기, 탕, 무채 삶은것이였고, 6.25때는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주둔하여 있었고 미군1개소대가 이곳에서 전멸하여 미군 폭격기가 얼마나 폭격을 했는지 집은 그때 다 타버렸고 그후 또 1.4후퇴때 인민군한테 당하고 피난도 못가고 고생했는데 그때도 역시 큰 전투인데 아마 낙동강 전투때는 물을 못 먹을 정도로 혈수가 나왔다 한다. 지금도 물이 나라의 정세에 민감함은 현대의 과학으로 증명하기 어렵다고 증언한다.



- 소재지 : 단양읍 수촌리 79번지, 단양읍 수촌리 55번지 근처
- 제공자 : 단양읍 수촌리 송영식(70)송순천(72)
- 체보자 : 단양읍사무소 윤수경(9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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