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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읍

단양읍 단양농학 농민운동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자
2007년 12월 26일 0시 0분 0초
조회
5,177

동학을 동학농민전쟁, 동학혁명, 동학농민 운동이라고 한다. 단양에는 단양의 접주 민사엽이 충주, 청풍, 동학군과 합세하여 186대 단양군수였던 정의동의 관사와 군청을 습격하여 군수를 축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1981년에는 유명한 용담유사가 단양땅에서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단양 사람으로 아는 사람이 없다.
용담유사는 1881년 충청도 단양 남면 샘골 ( 대강면 남 천) 여규덕, 정기현의 집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활발한 동학운동에 당시 교주였 던 최시형이 가산의 정석현씨 집에서 3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학을 하다가 쫓겨갔다고 했다.
그지점이 바로 현재 가산1리 삼거리 산쪽이다. 강경재는 (강수) 영춘 의풍과 동대에 은거하면서 어상천면 율곡리 제천, 청풍, 영월쪽까지 동학운동을 했다고한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이 단양에 정착한 것은 태백산맥, 소백산맥 즉 양백지간 10승지를 저항의 거점지로 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최시형의 부인 손씨가 단양 옥에 갇히자 최시형이 도주하는데 가산, 남조, 남천, 동대, 의풍으로 간다. 베틀재의 노루목의 사기막골에 동학의 최고 책임자인 최시형의 처가집이 있어 이곳에 머문다. 이때에 박용걸, 박용한 후손 박영남 ( 의풍리에 살다가 영월로 이주함 ) 집에서 옷을 갈아 입고서 영월 하동으로 갔다고 하며 이때 도인(천도교인) 권지하, 김연수이 안동김씨를 소개했다고 했으며 고종 22년 ( 1885년) 심상훈 체포 강한주를 데리고 피신. 이때에 단양사람으로 을미년에 영춘의 안영한(57) 단양의 임재수(74)가 10년씩 구형되었다고 전하고있으나 고종32년 (을미 1895) 개국504년 3월 판결문(별표)에는 杖一百徒 3년에 처한다했고 단양사는 임재수 (74) 는 杖一百流 三千里에 처하노라하고 판결 선고 되었다.

동학을 하는 사람은 다 쫓겨가고 집안도 가버렸다. 극형에 처한 성두한의 가족을 알아 보려고 의풍리에서 면담을 했으나 일본인의 혹독한 처벌 그후 의병난리에 일본인의 분푸리 학정, 6.25사변때 인민군의 사단본부가 주둔하면서 철수시 저지른 만행, 국군이 점령하면서 부역자의 보복등 3중 4중 피해 받은 곳이기에 모두가 확실한 신분이 아니면 이야기 하지 않고 취중이 아니면 본심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성두한의 가족중 성대호(생존117세 서낭골 거주)를 중심으로 성종우를 추적했으나 6.25때 호적은 멸실되었고 토지대장에 의풍리 산 69번지에 성두호 연명대장(1918년)을 추적 탐문하였으나, 찾을수 없고 사기막골에 살던
박씨 : 박경남 (영월로이사 김성낙<오목에 살고 있음 82세>)
김씨 : 김기근, 태복(중원 산척거주) - 손종국(와곡거주) - 사육신난리때 - 피신(김문기 병조판서의 후손)
신씨 : 신승균(청주이사) - 신보현(망)로만 파악되였다.

둘째는 동학농민과 공모하여 정권장악을 기도했다는 대원군 손자 이준용(李竣鎔), 청군을 불러들였던 민씨세도가의 핵심 민영준 등에 대한 형사판결문은 동학농민들이전개한 일련의 개혁운동이 당시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1894년 3월부터 1895년 초까지 걸쳐 활동했던 동학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진압된 후에도, 1900년대에 서정만 (徐定萬)등이 속리산을 중심으로 계속하여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운동에는 1894년 5월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경북지방의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1894년 이후에도 동학농민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1904년 천도교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밝히는 실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는 민사판결문의 내용들은 소위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부패상과 일반인들의 이권분쟁 실상을 밝혀주고 있지만 이를 통해서 당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수준을 파악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모든 분쟁의 원인은 상품, 화폐경제의 발전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다시말하자면 당시 우리나라는 근대적 개혁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 나아가야할 상황이었다는 점을 반증해 주고 있다.

다섯째는 손병희와 그의 제자로서 일진회 회장이 된 이용구가 원산의 "윤영창(允泳昌)"객주회사 소유권을 둘러싸고 벌인 민사재판은 천도교와 일진회의 재정기반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이다. 이 객주회사는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 중인 상황에서 1902년 무렵에 그의 동생 손병흠(孫秉欽)을 시켜서 창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섯째 갑오개혁정권이 설치한 재판소는 재판장을 법부대신이 맡는 등 형식은 근대적 체계를 갖추었지만, 형법은 아직도 전근대사회의 법률인 대명률(大明'律)과 대전회통(大典會通)이었다는 점이다. 판결문을 통해서 우리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동학운동을 하였으나 폐쇄된 시기 가문과 씨족관념이 확실한 조상들속에 면면히 근대사회로 나가는 과도기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지역의 많은 자료가 나왔으면 한다.

특히 교주였던 최시형이 3년간 가산에서 머슴을 살면서 동학을 하였고 교주 최시형의 처가집이 영춘 의풍 사기장골이라서 십승지와 화전민, 산악을 중심으로한 많은 동학이야기가 있을텐데 나오지 아니함이 아쉽다. 동학→의병→6.25로 이어지는 항쟁사는 단양이 가지고 있는 숙제 거리이며 언제고 한번은 다루어야 할 지역현안 사업이다.

갑오 3월 27일 오남창의대장소 재백산

격 문(1894년 음 3월 27일)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거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이 무리를 구축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깊은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동학군 4대 강령(1894년 음 3월 25일)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하라.
  3. 일본 오랑캐를 축멸하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진멸 하라.

동학군 12개조 기율(1894년 음 4월)

  1. 항복한 자는 대접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욕한 자는 추방한다.
  4. 순종하는 자는 경복한다.
  5. 도주하는 자는 쫓지 말라.
  6. 굶주린 자는 먹인다.
  7. 간활한 자는 없애 버린다.
  8. 가난한 자는 도와준다.
  9. 불충한 자는 없애 버린다.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11.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
  12. 불효한 자는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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